Gangnam Republic — AURANIM Original Series

EPISODE 001

자격

Qualification

해질녘 서울,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도시

언제가부터 강남을 동경했고, 지금 살고 있다. 이제는 이걸 유지 하기위해, 아니 지키기 위해 새벽같이 출근했고, 야근을 견뎠고, 주말에도 고객 전화를 받았다. 회식 자리에서 웃기 싫어도 웃었고, 상사가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십오 년을 버텼다.

대출은 10억 원이었다.

그래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아니.

후회하면 안 되는 선택이었다.

“아빠, 늦었어.”

눈을 떴을 때, 아들 지우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교복 셔츠 단추는 하나가 잘못 끼워져 있었고, 한 손에는 영어 단어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시계를 봤다.

오전 7시 41분.

또 늦었다.

주방에서는 토스트 냄새가 났다. 아내 수진은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얼굴이었다. 식탁 위에는 학원 가방, 학교 알림장, 카드 명세서, 관리비 고지서가 함께 놓여 있었다.

이 집에서는 모든 것이 교육과 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 지우 영어학원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알지?”

수진이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응.”

“그리고 수학 문제집도 사 와. 지난번 거 다 풀었대.”

“응.”

“당신 오늘 광화문이지?”

“고객 미팅 있어.”

“또 늦겠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식탁에 앉자 지우가 단어장을 내밀었다.

“아빠, 이거 뭐야?”

나는 커피잔을 들다 말고 단어장을 봤다.

Qualification.

“자격.”

“자격?”

“응. 어떤 걸 할 수 있는 조건 같은 거.”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단어장 옆에 삐뚤빼뚤하게 적었다.

Qualification = 자격.

나는 그 글자를 잠시 바라봤다.

자격.

이상하게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얼른 먹어. 늦어.”

수진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토스트는 이미 식어 있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아침마다 전시장 같았다.

검은 벤츠, 흰색 BMW, 테슬라, 포르셰. 차들은 조용히 움직였고, 사람들은 바쁘게 걸었다. 모두 피곤해 보였지만 누구도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게 좋았다.

강남의 피로는 이상하게도 실패처럼 보이지 않았다.

성공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하는 피로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같은 층에 사는 여자가 아이 손을 잡고 들어왔다.

“어머, 지우 아버님. 오늘 직접 등교시키세요?”

“네. 오늘은 제가 시간이 돼서요.”

사실 시간이 된 게 아니라, 억지로 만든 것이었다.

여자는 지우를 보며 웃었다.

“지우는 이번에 영어 어디 다녀요?”

“아직 그대로요.”

“아, 거기요? 요즘 대기 엄청 길다던데. 잘 잡으셨네요.”

나는 웃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운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줄을 섰고, 수진은 몇 달 동안 정보를 모았다. 나는 원장에게 세 번이나 전화를 했다. 그렇게 겨우 넣었다.

그게 강남이었다.

아이 하나를 학원에 넣는 일에도 전략이 필요했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자 대치동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학원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아이들은 자기 몸보다 큰 가방을 메고 뛰어갔다. 엄마들은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를 확인했고, 아빠들은 정장을 입은 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곧장 차에 올랐다.

지우가 내 손을 잡았다.

“아빠.”

“응.”

“민준이 이사 간대.”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어디로?”

“쌍문동.”

걸음을 멈출 뻔했다.

“왜?”

“아빠 회사가 어려워졌대.”

지우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아이에게 회사가 어려워졌다는 말은 감기에 걸렸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회사 하나가 흔들리면 집이 흔들린다.

집이 흔들리면 학교가 흔들린다.

학교가 흔들리면 아이의 세계가 흔들린다.

그리고 강남에서 아이의 세계가 흔들린다는 건, 부모의 실패를 의미했다.

나는 지우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우리는 괜찮아.”

지우가 나를 올려다봤다.

“진짜?”

“그럼.”

나는 웃었다.

지우도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건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확신이 없을수록 더 단단하게 말해야 하는 사람.

아이가 학교 정문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학교 앞에는 아이들을 내려주고 떠나는 차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차문이 열리고, 아이가 내리고, 문이 닫히고, 차가 사라졌다.

모든 것이 정확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가는 이 풍경을 숨 막힌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안심이 됐다.

이 안에 있는 한, 적어도 우리 아이는 밀려나지 않을 것 같았다.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늘 막혔다.

한강을 건널 때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강남의 아파트들이 사이드미러 안에서 점점 작아졌다. 나는 매일 아침 강남을 떠나 돈을 벌러 갔다. 그리고 밤마다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강남에 살기 위해 강남 밖에서 일하는 삶.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살았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정부는 오늘 국가행정 AI 시스템 넥서스의 시범 운영 결과를 발표하고, 향후 행정 효율화를 위한 새로운 개편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나는 채널을 돌렸다.

경제 뉴스는 아침부터 피곤했다.

오늘은 고객 미팅이 있었다. 이번 계약을 따내지 못하면 팀장 눈치가 보일 것이다. 성과급도 줄어들 수 있었다. 이미 줄어들고 있었지만, 수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회사에 도착하자 회의실 공기가 무거웠다.

팀장은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이번 분기 숫자 봤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본사에서 계속 말 나옵니다. AI 도입되면 관리직 효율화부터 들어갈 거라고.”

누군가 작게 웃었다.

“과장님들 긴장하셔야겠네요.”

나도 따라 웃었다.

웃어야 했다.

그런 농담 앞에서 정색하는 순간, 정말 불안한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자 메일이 쌓여 있었다. 고객 요청, 내부 보고, 비용 검토, 실적 업데이트. 하나를 지우면 두 개가 새로 들어왔다.

나는 모니터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세상은 최소한의 자리는 내어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믿고 싶었다.


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다.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거실은 조용했다. 식탁 위에는 랩이 씌워진 국과 반찬이 놓여 있었다. 수진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왔어?”

“응.”

“밥 먹을 거야?”

“회사에서 대충 먹었어.”

수진은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지우 오늘 기다리다 잤어.”

“많이 늦었네.”

“당신은 늘 늦어.”

나는 넥타이를 풀었다.

“미안.”

수진이 노트북을 닫았다.

“당신은 늘 미안하다고만 해.”

나는 또 대답하지 못했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지우는 잠들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숙제장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숙제 제목은 이랬다.

내가 가장 살고 싶은 곳.

지우는 연필로 크게 적어놓았다.

강남.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이어졌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게 맞았다.

힘들어도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대출이 많아도, 카드값이 밀려도, 회사에서 버티기 힘들어도 괜찮았다.

아이가 그렇게 믿고 있다면.

우리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다면.

나는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정부 긴급 알림이었다.

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대한민국 국가행정 AI NEXUS.

내일 오전 9시.

국가 운영체계 개편안을 발표합니다.

나는 잠시 화면을 보다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또 무슨 정책이야.”

나는 지우의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깊게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내가 가진 모든 자격이 심사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Episode 001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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