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받았다 — AURANIM Original Series
CHAPTER 04
선을 넘지 않는 사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회사명은 모두 가명이며, 일부 배경은 각색되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과 회사명은 모두 가명입니다.>
서진우한테서 연락이 왔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낮았다.
“알카켐에서 내사 들어왔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슬블로 메일이 올라갔어. 미국 본사까지.”
잠깐 멈췄다.
“J&S 얘기야.”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며칠 사이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알카켐은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움직였지만, 안에서는 조용히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주주명부를 확인했고, 연결된 법인을 찾아냈고, 관련 서류를 확보했다.
그리고 콘퍼런스 미팅이 잡혔다.
“그 자리에서 받았어.”
서진우가 말했다.
“증거 서류.”
잠깐 침묵.
“그때 알았지. 다 보고 있었던 거야.”
그는 노트북을 부쉈다고 했다.
정보가 담긴 노트북이었다.
그 장면이 CCTV에 남았다.
코로나 시기였다.
국경이 막혀 있었고, 본사 인력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어려웠다.
본사가 직접 개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서진우는 그 틈에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결국 나왔어.”
그가 말했다.
며칠 뒤, 다시 연락이 왔다.
“회사 이름 바꿔야겠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근데 정진동은 다르게 움직였다.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대신 하나를 더 만들었다.
사이언스켐.
J&S를 그 위에 올렸다.
나는 그 구조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근데 결과는 단순했다.
내 소속이 바뀌었다.
J&S에서 사이언스켐으로.
변경되는 날, 혜연이 서류를 내밀었다.
“부장님, 근로계약서요.”
나는 서류를 넘겼다.
겸업금지. 비밀유지. 책임 조항.
J&S에서는 없던 내용이었다.
나는 잠깐 멈췄다.
서명하기 싫었다.
근데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서명했다.
서진우는 회사를 나왔지만 완전히 빠진 건 아니었다.
알카켐 지분 30%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근무하지 않아도, 판에서는 빠지지 않았다.
J&S에 합류한 지 한 달쯤 됐을 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정진동 아들이었다.
“출근하셨어요.”
말은 했지만 시선은 핸드폰에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잠깐 멈췄다가 다시 껐다.
“오늘 뭐 하면 돼요?”
나는 책을 한 권 밀어줬다.
“이거부터 보세요.”
그는 책을 내려다봤다.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이거 꼭 알아야 돼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잠깐 후 말했다.
“그냥 거래처 전화부터 해볼게요.”
번호를 누르다가 멈췄다.
“근데 뭐라고 해야 돼요?”
나는 그를 한 번 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제가 이런 것도 해야 돼요?”
나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날 알았다.
이 사람은 일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며칠 뒤였다.
이번에는 딸이 사무실에 나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 미팅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이 연결해 주신 분이에요.”
그녀는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으로 통화를 했다.
잠깐 자리에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그날 그녀 자리는 하루 종일 비어 있었다.
정진동이 나를 불렀다.
“은부장.”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애들 좀 봐줘요.”
그는 웃고 있었다.
“공부도 좀 시키고, 일도 가르쳐줘요.”
잠깐 멈췄다.
“야간대학도 알아봐 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은부장, 왜 애들 안 챙겨? 일도 좀 가르치고, 노하우도 알려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대학은 알아봤어?”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다음 날, 책을 들고 출근했다.
물류 기본서. 위험물, 유해화학물질 관련 법규.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나는 메일을 보냈다.
정진동과 자녀들에게.
업체 리스트를 정리했고, SOP를 만들었고, 연락 가능한 번호를 붙였다.
“한 번 연락해 보세요.”
오후가 되어서야 아들이 다시 출근했다.
숙취 때문인지 말이 없었다.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딸은 나오지 않았다.
여행 중이라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정진동은 다른 걸 하고 있었다.
자녀들에게 따로 사람을 붙이고, 금융사를 연결하고, PF 자금 흐름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옆에서 봤다.
내가 만든 SOP는 쓰이지 않았다.
책도 열리지 않았다.
대신
사람 이름이 오갔다.
전화번호가 오갔다.
법인 계좌 목록이 전달됐다. 법인카드도 같이 넘어갔다.
“여기 연결해 봐.” “이쪽이 돈 움직여.”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들었다.
그날 알았다.
이 구조에서 필요한 건 지식이 아니었다.
연결이었다.
그리고 돈이었다.
나는 그걸 업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건 구조였다. 빠져나오는 구조는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