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봉구 창동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노원구청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셨다. 아버지의 목표는 내 집 마련이었는데, 그 집이 아파트가 아니었다. 다세대주택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다세대주택은 월세를 받을 수 있었다. 몸으로 버는 월급 말고, 집이 벌어다 주는 부수입. 그 시절 그 동네엔 아파트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도 월세를 내고 살았는데, 그때는 집주인이 왕이었다. 어린 나도 부모님이 집주인 눈치를 보던 걸 기억한다. 아버지에게 다세대주택은 재테크가 아니라, 눈치 보는 쪽에서 눈치 안 봐도 되는 쪽으로 건너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 1, 2학년 때였으니 30년 전이다. 아버지는 그 목표를 이루셨다.

아버지의 다음 계획도 있었다. 아들이 결혼하면 그 다세대주택 1층에 살게 하는 것. 그런데 내가 결혼할 때가 되니 세상에 이상한 게 생겨 있었다. 며느리는 시댁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풍습도 아니고 관습도 아닌 무언가. 그래서 1층은 무산됐다.

신혼집은 아내가 가지고 있던 상계동의 작은 아파트였다. 15년 전쯤, 2억 정도 했다. 몇천만 원이 있으면 1억쯤은 담보대출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아내가 말했다. 컨디션 좋은 아파트로 가자. 상계동 집을 3억쯤에 팔았다. 세금 떼니 남는 것도 없었다. 창동의 비교적 신축 아파트가 4억 후반. 1억 몇천을 또 대출받아 갔다. 그때만 해도 대출이 까다롭지 않았고, 집값이 폭등한다는 느낌도 없었다. 강남도 대출을 무리하면 가긴 가겠다, 유지가 어렵겠지만 — 그 정도 감각이었다.

그러다 대통령 탄핵 이야기가 나오면서 집값이 들썩하는 듯했다. 아내가 말했다. 애는 우리처럼 서울 변두리 취급 받는 곳에서 키우기 싫다고. 창동 집이 그때 5억, 30평이었다. 강남은 12억에서 13억. 잠실은 9억에서 10억. 어찌저찌 또 무리해서 대출을 받았다. 잠실 대단지에 급매가 있었다.

그런데 계약을 하고 나니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잔금을 치를 때가 되자 매도인이 말했다. 5천만 원을 더 주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위약금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면서. 주변에서 빌려서 5천을 더 주고 이사했다. 그렇게 10억을 줬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10년 살면 15억쯤 되려나.

그게 30억이 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성공담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다른 반쪽이 있다.

내 첫 신혼집, 상계동 그 아파트는 아직 3억이다. 잠실의 10억이 30억이 되는 동안, 상계동의 3억은 3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그 다세대주택을 파셨다. 20년 전 1억 6천에 산 집을 5년 전 6억에, 빌라업자에게. 그리고 쌍문동의 2억짜리 아파트로 들어가셨다. 그 집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값이 거의 그대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 두신 다세대주택이 한 채 더 있는데, 팔려고 내놓은 지 5년째 팔리지 않는다. 두 채를 합치면 7억에서 8억이다.

정부는 집값을 잡겠다고 한다. 어머니의 집은 오른 적이 없다. 잡을 것도 없는데, 다주택자라서 잡힌다고 한다.

나는 잠실 집을 팔고 학군지인 역삼동으로 왔다. 잠실에서 30평을 팔았는데 강남에 오니 20평이 됐다. 같은 서울인데 평수가 환율처럼 움직인다. 나라 전체가 아이가 없다는데, 아이가 다녔던 잠실의 초등학교도, 지금 강남의 초등학교도 한 반에 27명, 30명이다.

한 가족이 같은 도시에서 세 개의 경제를 살았다. 평생 일해서 집을 산 아버지의 경제. 이사 갈 때마다 대출을 얹었을 뿐인데 집이 월급보다 빨리 벌던 나의 경제. 그리고 옛날의 정답을 그대로 지켰는데 집이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그런데 규제는 정확히 그쪽으로 가는 어머니의 경제.

아버지는 눈치 보는 쪽에서 눈치 안 봐도 되는 쪽으로 건너가려고 평생을 일하셨다. 그 강을 건너는 데 한 세대가 걸렸다. 지금 그 강은 훨씬 넓어졌는데, 다리는 그때보다 적다.

참,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래서 일단 여기에 적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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