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받았다 — 9화. 무너지기 시작한 사람들

그냥 받았다 — AURANIM Original Series

CHAPTER 09

무너지기 시작한 사람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회사명은 모두 가명이며, 일부 배경은 각색되었습니다.

< 이 글에 나오는 이름, 회사명은 가명입니다.>

경찰 조사가 끝난 뒤에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였다.

회사에서 견적서를 정리하고 있는데 변호사 형에게 전화가 왔다.

“또 들어왔어.”

나는 모니터를 보다가 손을 멈췄다.

“뭐가요?”

형이 짧게 말했다.

“민사.”

나는 잠깐 말이 없었다.

“누가요?”

“성안로지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건 또 뭡니까?”

형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언스켐 위에 새로 만든 법인이래.”

잠깐 침묵이 흘렀다.

“추가 PF 받으려고 만든 회사라고 하더라.

대표는 정진수”

“정진수? 정진동 아들인데요”

나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천천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진동은 자녀들을 통해 다시 법인을 만들고 있었다.

사이언스켐 위에 성안로지스.

구조 위에 또 구조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회사가 나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었다.

변호사 형이 낮게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자료 더 준비해야 돼.”

창밖을 봤다.

퇴근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하루가 둘로 나뉘었다.

낮에는 영업사원처럼 일했고,

밤에는 피고인처럼 살았다.

변호사 비용이 또 나갔다.

계약서를 다시 꺼내고,

메일을 다시 정리하고,

날짜를 다시 맞췄다.

어느 날 새 회사 회의실에서 혼자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팀원 하나가 지나가다 멈췄다.

“차장님 아직 안 가세요?”

나는 급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어… 조금만 더 하고.”

팀원은 웃으며 나갔다.

회사 사람들은 몰랐다.

나는 낮에는 고객사 미팅을 다녔고,

밤에는 소송 자료를 정리했다.

집에 들어오면 아이가 달려왔다.

“아빠.”

나는 웃었다.

소송 서류는 가방 안에 있었다.

그 무렵 서진우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은부장.”

“네.”

“정진동이 나 고소했어.”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놀랍지 않았다.

“무슨 건으로요?”

서진우가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사기.”

잠깐 정적이 흘렀다.

“PF 받을 때 내가 준 계약서 있잖아.”

“알카켐 계약서…”

“그거 위조라고 고소했어.”

나는 말이 없었다.

사실 정진동도 알고 있었다.

그 시점에 서진우가 알카켐 대표가 아니라는 걸.

그런데도 정진동은 서진우를 앞에 세웠다.

금융사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알카켐 대표입니다.”

“같이 사업하는 파트너입니다.”

그리고 그 계약서를 들고 PF를 받았다.

그때는 같이 웃었다.

같이 움직였다.

같이 돈 이야기를 했다.

근데 이제는 아니었다.

정진동은 말했다.

자신은 속았다고.

피해자라고.

나는 조용히 물었다.

“알카켐도요?”

서진우가 낮게 말했다.

“어.”

“정진동이 그 계약서 들고 알카켐에도 갔대.”

잠깐 침묵이 흘렀다.

“당신들이 이런 계약서 작성했으니까 보증하라고.”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서진우 숨소리가 들렸다.

“은부장.”

“네.”

“정진동이 이제 나 모른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우가 웃었다.

짧고 메마른 웃음이었다.

“PF 받을 때는 맨날 형님 형님 하더니.”

그 말 뒤가 길게 비었다.

정진동은 살아남기 위해 서진우를 버렸다.

서진우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알카켐까지 끌려 들어왔다.

서진우가 낮게 말했다.

“은부장, 너도 조심해.”

나는 웃었다.

“이미 늦은 거 아닙니까.”

서진우도 웃었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천천히 말했다.

“다 같이 돈 벌려고 시작한 건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도 처음부터 서로를 죽이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겠지.

근데 구조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했고,

그러려면 누군가는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지금.

모두가 서로를 범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전화가 끊어지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회사 밖에서는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내일 고객 미팅 자료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메일 창을 띄웠다.

견적서를 정리했다.

운임을 확인했다.

평범한 회사원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근데 화면 한쪽에는 민사소송 파일이 같이 열려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일을 하는 건지,

살아남는 건지,

구분하지 못하게 된 걸까.

AURANIM 뉴스레터

새 글이 발행되면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스팸은 없습니다 — 언제든 구독 취소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