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받았다 — AURANIM Original Series
CHAPTER 12
무혐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회사명은 모두 가명이며, 일부 배경은 각색되었습니다.
퇴근길이었다.
우편함을 열었다.
고지서 몇 장.
광고지.
그리고 봉투 하나.
발신인을 봤다.
경찰서였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계단 입구 쪽에 서서 봉투를 뜯었다.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천천히 펼쳤다.
증거불충분.
혐의 없음.
한 번 더 읽었다.
같은 말이었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생각보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기뻐야 하는데,
기쁘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오래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긴장이 갑자기 풀리면 안도감보다 멍함이 먼저 온다.
그런 기분이었다.
봉투를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평소와 똑같이.
집에 들어오니 아이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아내는 부엌에 있었다.
냄비에서 뭔가 끓는 소리가 났다.
“왔어요?”
“응.”
나는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저녁을 먹었다.
가족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혼자 가지고 있던 일이었다.
아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하기도 싫었다.
그냥 끝났다고 생각했다.
민사는 남아 있었다.
정진동이 청구한 금액은 20억이었다.
변호사 형에게 전화가 왔다.
군대 선임이었다.
이 사건이 시작된 뒤부터는 거의 매일 통화했다.
“형사 무혐의 나왔으니까 민사도 비슷하게 갈 거야.”
“얼마나 걸려요?”
“한 6개월.”
6개월 동안 서류가 오갔다.
준비서면.
답변서.
증거자료.
형이 처리했고,
나는 서명했다.
회사에서는 고객 미팅이 있었고,
견적서를 썼고,
전화가 왔다.
그 사이 소송도 진행됐다.
가끔 우편함을 열 때 손이 잠깐 멈추는 것 말고는
일상이었다.
6개월 뒤 결과가 나왔다.
승소였다.
변호사 형이 웃으며 말했다.
“민사 비용 청구할 수 있어.”
“하세요.”
며칠 뒤 형에게 전화가 왔다.
“계좌 추심 들어갔다.”
“얼마 나왔어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오십만 원.”
나는 웃지도 못했다.
20억을 청구한 법인이었다.
PF를 받았고,
로펌을 선임했고,
사무실도 있었다.
그 법인 계좌 잔고가 오십만 원이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 창밖을 봤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이상했다.
사람을 고소하고,
민사 걸고,
변호사 선임하고,
몇 년을 싸웠는데.
남은 건 오십만 원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조용했다.
정진동 이름도 뜨지 않았다.
소환장도 없었다.
우편도 없었다.
출근했다.
일했다.
퇴근했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퇴근길.
우편함을 열었다.
고지서.
광고지.
그리고 봉투 하나.
손이 먼저 멈췄다.
발신인을 봤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나는 계단 입구로 걸어갔다.
봉투를 뜯었다.
고소장이었다.
정진동.
다시.
한동안 종이를 내려다봤다.
무혐의.
승소.
추심.
전부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봉투를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집에 들어오니 아이가 TV를 보고 있었다.
아내는 부엌에 있었다.
“왔어요?”
“응.”
나는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평소와 똑같은 저녁이었다.
근데 나는 알고 있었다.
또 시작이라는 걸.
그날 밤 변호사 형에게 전화했다.
“형.”
“응.”
“또 들어왔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형이 말했다.
“이번엔 조금 다를 수 있어.”
“왜요?”
“경찰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럼요?”
형이 낮게 말했다.
“검찰까지 갈 수도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은 조용했다.
집도 조용했다.
근데 머릿속은 다시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무혐의는 끝이 아니었다.
적어도 정진동에게는.
